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(문단 편집) ==== 상해파의 한인 부대 통합 시도 ==== 이렇게 들어온 [[독립군]]들에 대한 관리를 맡은 것은 원래 상해파였다. 이유는 상해파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통해 [[극동 공화국]]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. 이에 '''전한군사위원회'''가 설치되어 [[한인]] 부대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시로 이동해 온 [[간도]] 독립군 상당수는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[[사할린부대]](대한의용군)로 들어갔다. 자유시엔 1921년 1~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·다반군대·니항군대·자유대대·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·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·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이었는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. 반면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.[* 백기인·심헌용, 2017, 96~98 [[https://www.fmkorea.com/index.php?mid=best&document_srl=3008795647|펨코 재인용]]] 참고로 대한의용군=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다.[* 윤상원, 2010, 178; 윤상원, 2017, 『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』, 한국사연구 (178) , 243 쪽; 임경석, 2009, 『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』,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, 172 [[https://www.fmkorea.com/index.php?mid=best&document_srl=3008795647|펨코 재인용]]]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.[* 윤상원, 2010, 180; 윤상원, 2017, 245; 임경석, 2009, 173~174 [[https://www.fmkorea.com/index.php?mid=best&document_srl=3008795647|펨코 재인용]]]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"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."[* 윤상원, 2010, 175~176 [[https://www.fmkorea.com/index.php?mid=best&document_srl=3008795647|펨코 재인용]]] 그러니까 '''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 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받기를 원했던 것이다.''' 그리고 이 와중에 1921년 1월 설치된 '''코민테른 극동비서부(동양비서부)'''[* 전술되었듯이 이르쿠츠크파를 후원한 기관이다.]가 4월부로 러시아의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았다. 이러한 결정권자의 변화로 인해 한인 부대 관련 정책이 일부 바뀌면서 상황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